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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마음이 멈춘 시간

route4096 2025. 6. 14. 17:06

개와의 이별, 그리고 멈춰버린 마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한 마리 개를 돌보게 되었다. 어떤 분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그분이 기르던 골든 리트리버가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제법 큰 덩치인데 온순했고 사람을 잘 따랐다. 매일 같은 시각에 그 개를 산책 시키는 것은 나의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개에 대한 애정이 생겼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동물과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산책 도중, 나의 실수로 개가 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를 낸 차량은 영업용 택시였고, 운전자는 여성 기사 분이였다. 울면서 택시 기사분 쪽을 바라 보니, 그 기사님도 한쪽 모퉁이에서 힘없이 않아 있었다. 한 손에 박카스를 들고 슬픈 눈빛으로 묵묵히 나를 보고 계셨다. 자신도 놀란 가슴을 추스리는 중이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아버지가 오셔서 상황을 정리하셨고, 개의 죽음도 처리하셨다. 힘없이 늘어져서 머리부분에서 끈적한 피가 도로에 번져가는 모습은 내 기억에 좋지 못한 모습으로 오랫동안 각인되어져 있다. 그 이후로는 피가 튀거나 번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보지 않게 되었다. 지난 날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트라우마(Trauma)란,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렬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겪은 뒤, 그 경험이 심리적 상처로 남아 오랜 시간 동안 감정, 인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한다. 나에게 있어 그 사건은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서 마음이 멈춰버린 경험이며, 트라우마라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 버렸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출처 : 픽사베이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트라우마(Trauma)는 단순한 ‘나쁜 기억’이 아니다.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이 마음에 상처를 남긴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감정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사건이 무의식에 고착되어, 이후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 학대, 사고, 이별 등은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내 경험처럼 반려동물의 사고와 같은 사건도, 감정이 멈춘 채로 시간이 멈춰버린 순간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트라우마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감정적 압도감이다. 감정과 이성이 압도당하면서, 뇌는 이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고통의 기억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저장하게 된다.

트라우마의 작동 메커니즘

트라우마는 단순히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뇌의 생리적인 반응과 깊이 연관된다.

1. 편도체의 비상경보

사건 발생 시, 뇌는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편도체를 활성화시킨다. 이는 공포, 위기, 위협에 반응하는 감정센터로, 즉각적인 경보를 울려 우리 몸에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2. 해마의 기능 저하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는 이런 강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트라우마 경험은 시간적 순서가 없는 파편적인 형태로 저장된다. “그때 그 장면만 반복해서 떠오른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트리거(Trigger)의 작용

이후 삶에서 유사한 장면, 분위기, 냄새, 소리 등이 다시 나타나면, 뇌는 그때와 같은 위험 상황으로 착각하여 동일한 신체적,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 재경험이다.

트라우마의 역할 : 생존인가, 족쇄인가?

트라우마는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 긍정적인 기능

  • 위험 회피 본능: 유사한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화된다.
  • 감각 민감도 향상: 주변 환경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다.

▸ 부정적인 영향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기억은 삶에 제약과 두려움을 남긴다.
  • 사소한 자극에도 과도하게 불안해지는 과잉 반응
  • 특정 상황, 장소, 인간관계를 회피함으로써 일상의 제약 발생
  • 수면 장애, 집중력 저하, 과민반응 등 다양한 신체적 고통 수반
이처럼 트라우마는 생존을 위한 경고 시스템이지만, 그 경고가 꺼지지 않고 계속 울릴 때, 우리는 고통받기 시작한다.

트라우마 회복의 핵심

트라우마는 ‘잊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기억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의 핵심은 안전하게 기억을 통합하는 것이다.

▸ 심리치료의 힘

  • EMDR(안구운동 탈감작 재처리) : 눈의 움직임을 유도하여 감정을 정화하고 기억을 재구성
  • 인지행동치료(CBT) :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아 현재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
  • 노출치료 : 트라우마 유발 상황을 통제된 환경에서 반복 경험하며 감정 반응 약화

▸ 신체 기반 접근

  • Somatic Experiencing : 몸의 긴장 반응을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방식
  • 요가와 명상 : 호흡을 통해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고, 신체와 감정의 연결을 회복

▸ 관계의 회복

  • 안전한 애착 대상과의 관계는 회복에 결정적이다.
  • ‘나의 상처를 누군가가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경험’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다.

멈춰버린 마음을 다시 움직이는 여정

어린 시절 나의 트라우마는 단지 개를 잃은 슬픔을 넘어서는 것이였다. 사고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에 압도되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 그 기억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 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행위 역시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던 그 상처의 회복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너무 힘들었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멈춰 있었던 마음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이 경험의 공유가 비슷한 트마우마를 경험했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